[댁의 아파트 관리비 새고 있진 않나요] [12]
[아파트 노후 방지 위한 적립금… 서울 아파트 단지 64%가 부당집행]
입주자대표가 충당금 담보로 주식투자했다 2억원 날려
멀쩡한 출입장치 교체하는 등 주민동의 없이 각종 공사도
2008년 4월 충남 천안시 J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앞으로 은행에서 빚을 갚으라는 독촉장이 날아들었다. 대출금 2억원을 빨리 갚으라는 내용이었다. 놀란 몇몇 동(棟)대표가 입주자대표회장 정모(41)씨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처음엔 "나도 모르겠다"던 정씨는 동대표들의 추궁이 이어지자 사실을 털어놓았다. 2억원은 정씨가 아파트(주민들) 재산인 장기수선충당금을 담보로 은행에서 빌린 돈이었다.
검찰 수사 결과, 정씨는 2007년 11월 아파트 재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장기수선충당금을 인출하기 위해서는 입주자대표회장인 자신의 도장 외에도 관리사무소장의 도장이 필요했다. 정씨는 "해고하겠다"고 관리사무소장을 협박해 도장을 받아냈다. 이렇게 해서 정씨는 금융기관 4곳의 정기예금 통장에 있던 장기수선충당금 4억7000만원을 자기 명의 은행 계좌로 옮겼다. 이를 담보로 5000만원을 대출받아 주식 투자를 하다 날리자 빌리고 또 빌려 대출금이 2억원으로 늘어난 것이다.
업무상 횡령 혐의로 기소된 정씨는 2009년 말 대전지법 천안지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도중 3000만원을 우선 변제한 정씨는 "날린 돈을 2014년까지 모두 갚겠으니 살려달라"는 각서를 썼다. 이를 믿은 주민들이 재판부에 탄원서를 내 '선처'를 받았다. 하지만 정씨는 지금까지 수백만원밖에 갚지 않았다고 주민들은 말했다.
장기수선충당금은 아파트 노후화(老朽化)를 막는 공사에 쓸 수 있도록 집 소유주들로부터 걷어 적립해두는 돈이다. '목돈 관리'는 입주자대표회장이 맡는다. 따라서 장기수선충당금 '곳간 열쇠'를 쥔 입주자대표회장은 은행 지점장들에겐 최고의 고객이다.
서울의 대단지 입주자대표회장은 "은행 지점에 10억원가량만 예치해주고 전화 한 통화만 하면 동대표 야유회 협찬을 받는 일 정도는 간단히 해결된다"고 말했다.
곳간 열쇠를 쥐고 '갑(甲) 행세'를 하는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다. 입주자대표회장이 장기수선충당금을 횡령하거나, 주민 허락 없이 이런 공사 저런 공사 명목을 만들어 써버리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서울 강남의 T주상복합아파트 3차 단지는 최근 입주자대표회의와 관리사무소가 장기수선충당금을 엉뚱한 공사에 쓰겠다고 하자, 주민들이 들끓었다. 입주자대표회의는 지문 인식 출입 장치를 새로 설치하겠다며 공사 비용을 관리비에 포함해 걷겠다고 공고했다. 일부 주민이 "별 필요도 없는 공사에 왜 돈을 걷느냐"고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입주자대표회의는 "그럼 관리비 대신 장기수선충당금을 헐어서 쓰겠다"고 했다. 주민들은 "장기수선충당금은 정해진 용도에 써야 하는데 출입 장치 교체에 쓰는 것은 법 위반"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장기수선충당금 부당 집행은 일부 단지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2011년 감사원 감사에선 서울시내 127개 아파트 단지 가운데 장기수선충당금을 계획 이외의 용도로 부당 집행한 곳이 81개 단지(63.8%)에 달했다. 부당 집행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공사 뒷돈 거래' 같은 의혹들이 뒤따른다. 하지만 직접적인 횡령이 적발되지 않는 이상, 최고 1000만원 과태료 부과가 가장 무거운 제재다. 준공한 지 24년 된 대전의 S아파트에선 2011년 8월부터 작년 6월까지 입주자대표회장 전모씨가 입주자대표회의 의결도 없이 공사를 5건 벌였다.
전씨는 운동기구 설치공사, 놀이터 보수공사, CCTV 설치 등을 하는 데 장기수선충당금에서 1억4300만원을 빼내 썼다. 주민들이 구청에 진정을 넣어 전씨는 과태료 1000만원을 부과받았다.
☞장기수선충당금
배관, 승강기 등 아파트 주요 시설을 수리·교체할 때 쓰는 돈이다. 미리 ‘장기수선계획’을 수립해 그에 따라 써야만 한다. 보도블록 교체 등 일상적 공사에 쓰는 ‘수선유지비’와 구분된다. 집 소유주가 내는 게 원칙이어서 세입자는 관리비에 부과된 장기수선충당금을 이사 갈 때 찾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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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립금 집값에 반영하고 단지별로 금액 공개해야
장기수선충당금 횡령·부당 지출 사례가 빈발하면서 관리를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매달 전국의 아파트에서 걷히는 장기수선충당금은 627억원으로, 작년 7월 기준으로 2조6539억원이 적립돼 있다. 사유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입주자대표회장·관리소장의 '양심'에만 관리를 맡겨두기엔 너무 큰돈이다.
횡령이 발생할 소지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장기수선충당금을 기금(基金)과 연계, 공적 관리를 강화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국토부는 국민주택기금에 충당금 적립을 유도하고, 대출도 국민주택기금에서 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서울시 이건기 주택정책실장은 "아파트 단지별로 적립한 장기수선충당금을 공개할 수 있는 통합 인터넷망을 구축하고, 장기적으로 충당금 액수의 많고 적음이 집값에도 반영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갈수록 재건축이 까다로워지고, 아파트 수명이 길어지는 점을 감안해 장기수선충당금 적립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토부에 따르면 아파트의 수명은 한국이 23년인 데 비해 이웃 일본은 30년, 독일은 79년, 미국은 100년이 넘는다. 한국 아파트의 수명이 짧은 것은 준공 이후부터 수선계획 등을 관리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국토부 집계 결과 관리비에서 매달 적립되는 장기수선충당금은 전국 아파트 평균 1㎡당 92원. 방 3개짜리 106㎡ 아파트라면 매달 9750원가량이다. 일본은 1㎡당 156엔(약 1700원)으로 우리의 18배, 독일은 1㎡당 9유로(약 1만2900원)여서 우리의 140배나 된다. 일본·독일 아파트가 우리보다 오래가는 이유는 장기수선충당금을 충분히 적립하고, 적재적소에 집행한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서울시가 올해 아파트 단지 3533개를 전수조사한 결과 12.4%인 438개가 준공 25년을 넘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 관계자는 "아파트의 급격한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서도 치밀한 수선 계획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충당금 몰래 써버린 강남의 한 아파트대표… 주민들, 비대위 만들어 법적 대응 끝에 해임
3년 전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에선 주민들이 힘을 합쳐 장기수선충당금 1억1400여만원을 자기 마음대로 쓴 입주자대표회장을 몰아냈다.
2010년 7월 1일 서울 강남구 T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가 주민들에게 "오늘부로 위탁관리업체가 바뀌었다"라고 방송으로 알렸다. 사전(事前)에 주민들에게 새 업체를 선정하겠다는 공고나 안내문도 보내지 않고 이뤄진 일이었다.
일부 주민이 알아보니 새로 관리 업체로 선정된 회사는 아파트 관리 경험이 전무한 회사였다. 또 이 업체는 전직 관리소장의 장인이 운영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비상대책회의를 만들어 입주자회장 S씨와 동대표들을 해임하기로 결의했다. 주민들은 입주자대표회의가 손대지 못하도록 관리비 통장 지출도 정지시켰다.
회장 S씨는 관리비에서 돈을 쓸 수 없게 되자, 정기예금에 넣어두었던 장기수선충당금에 손을 댔다. 장기수선충당금을 자신이 선정한 관리업체 직원 45명의 월급과 수당(9260만원), 신원보증보험료(82만원) 등에 써버린 것이다.
주민들은 법원에 S씨 등을 상대로 직무정지 신청을 내 승소했고, 검찰에 S씨를 고발했다. 올 2월 서울중앙지법(1심)은 "장기수선충당금은 수선 계획에 따라 입주자회의 의결을 거쳐 주요 시설 교체 등에 사용해야 한다"며 "S씨는 이런 절차를 모두 생략하고 임의로 돈을 인출해 쓴 만큼 업무상 횡령죄가 넉넉히 인정된다"고 밝혔다.
법원은 S씨가 개인적으로 돈을 착복한 것은 아니고 전과(前科)가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벌금형을 선고했다. S씨는 "장기수선충당금인 줄 몰랐고, 내 이익을 위해 쓴 일도 없다"며 항소한 상태다. 주민 이모씨는 "내가 사는 터전에서 벌어진 비리에 눈감아선 안 된다는 생각에 주민들이 뭉쳤다"며 "60% 넘는 주민의 뜻을 모아 비리를 몰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